반려악기… 의사·변호사·은퇴자도 "다시 설렌다, 악기는 내 삶의 비타민"
16-11-17 11:13 조회 4,792
[Story] 악기로 삶의 변주를 즐기는 사람들
악기 판매량 2년새 26% 증가… 국악기 강좌도 크게 늘어
"밴드 만들어 합주하고 공연하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희열"
“바이올린은 나의 두 번째 목소리”라는 전필승씨가 연주하는 모습./전필승씨 제공
“총 대신 바이올린을! 마약 대신 클라리넷을!”
1975년 경제학자이자 음악가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는 이 구호를 외치며 베네수엘라 빈민가 아이들 손에 악기를 쥐여줬다. 가난과 마약, 범죄에 찌든 11명의 아이가 모인 작은 오케스트라가 ‘엘 시스테마(El Sistema)’의 시작이었다. 아이들은 악기가 제대로 된 소리를 낼 때까지 인내를 배웠고, 마침내 음악을 성취했을 때에는 자신감과 용기를 얻었다. 각기 다른 악기들과 강약과 박자, 화음을 맞춰 연주할 땐 협동과 배려를 배웠고, 무대 위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하모니에서 감동을 얻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음악은 표현해낸다. 다른 예술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신비하고도 고유한 표현력을 지닌 음악은 인간에게 그 어떤 예술보다 깊은 영감을 준다.” 아브레우가 빈민가 아이들에게 악기를 쥐여주고 음악을 선물한 이유다.
악기를 한 번이라도 배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엘 시스테마의 기적에 공감한다. 제대로 된 소리를 내기까지 연습에 연습을 해야 하지만 마침내 원하는 선율이 흘러나왔을 때 느끼는 성취감과 짜릿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기 때문이다. 바쁜 일상 속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이 악기 연주에 기꺼이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는 이유다.
반려악기와 함께 삶의 변주를 즐기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의 얼굴에 넘치는 환희는 음악 그 자체였다.
내가 반려악기를 키우는 이유?
바이올린 켜는 변호사 바이올린을 평생 친구 삼았다는 변호사 장보혜씨./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장보혜(37) 변호사가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건 3년 전이다. "'성인 되고 바이올린 배우면 성질 버린다'는 말이 있다더니 진짜였어요(웃음). 조금만 노력하면 사라 장이나 클라라 주미 강과 비슷한 소리쯤은 내겠지 했던 희망은 버린 지 오래고요, 하하!" 취미로 시작했지만 바쁜 업무 탓에 연습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실력이 쉽게 늘지 않아 포기하려고 했던 적도 여러 번. 하지만 장 변호사가 바이올린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힐링이죠. 주말에도 사건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데 바이올린 켜는 동안만큼은 소리와 악보에만 집중하게 되니 마음이 편해지고 머리가 맑아져요."
삼성화재에 근무하는 전필승(30)씨도 퇴근 후 바이올린 연습을 쉬지 않는다. 평일은 물론 주말까지 일주일에 예닐곱 시간을 바이올린에 할애한다. "5~6시간 연습해서 단 5분이라도 원하는 소리가 났을 때의 성취감이 엄청나죠. 직장 생활만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삶의 희열이랄까요." 아마추어 연주자이지만 1500만원짜리 바이올린을 장만할 만큼 악기에 대한 투자도 아낌없다. "바이올린은 저의 두 번째 목소리나 마찬가지니까요."
'반려악기 키우기'는 반려동물·반려식물 돌보기보다 훨씬 까다롭다. 오랜 시간 꾸준히 실력을 연마해야 하고, 악기 구입비·레슨비 같은 금전적 투자가 이뤄져야 하며, 때로 방음이 되는 연습 공간도 확보해야 한다. 이 쉽지 않은 조건에도 반려악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과 달리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매우 능동적인 행위"라면서 "처음에는 삑삑 소리만 내지만 무수히 많은 실패를 극복하고 제대로 연주해냈을 때 얻는 성취감이 높고 이를 통해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반려악기가 주는 정서적 안정감과 자신감은 반려동물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해금과 가야금, 거문고가 뜬다
색소폰 부는 의사 색소폰 연주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성형외과 전문의 김인규 원장./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직원들 퇴근할 때만 기다려요. 진료실에 혼자 남아 색소폰 불 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성형외과 전문의 김인규(46) 원장은 진료를 마친 늦은 밤이면 혼자 남아 색소폰 삼매경에 빠진다. 진료와 수술로 쉴 새 없이 보낸 하루의 피로와 스트레스가 '빰빰빰빠~' 소리와 함께 말끔히 날아간다. 19년 전 공중보건의 시절 재즈 음악에 심취하면서 색소폰을 만났다. "의사란 직업이 멈추지 않은 기차에 탄 듯 스트레스가 많잖아요. 머리엔 늘 마그마가 끓고요. 색소폰을 불면 몸속 나쁜 열기가 싹 가시면서 엔도르핀이 샘솟아요. 저 자신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죠."
한국트렌드연구소 김경훈 소장은 "소득 증가, 그리고 개인주의 성향이 커지면서 가치 중심적인 소비 트렌드가 확산되고 있다"며, "2030세대는 물론 악기, 운동 같은 취미 활동에도 시간과 비용 투자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 쇼핑몰 G마켓에 따르면 올해 10월까지 악기 판매량은 2014년 동기 대비 26% 증가했다. 판매량이 늘어난 악기도 드럼·젬베·피아노·트럼펫·바이올린 등으로 다양하다. 주민자치센터부터 백화점 문화센터까지 악기를 배울 수 있는 공간도 많아졌다. 신세계아카데미에 따르면 "기악 클래스 수강생이 지난해와 비교해 20% 이상 증가했으며, 최근에는 악기를 배우려는 20~30대 비중이 커지고 있는 추세"라고 했다.
가야금·거문고·해금 등 국악기도 급부상하고 있다. 용산에서 해금과 가야금 강좌를 열고 있는 '아리랑스쿨' 문현우 대표는 "1년 전 3~4명에 불과하던 수강생이 300명 이상으로 늘었고, 1~2개 반에 불과하던 수업도 65개 반까지 늘어났다"고 전했다. "사극의 인기와 한복 열풍도 영향을 미쳤지만 국악기를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었던 탓이 크다"는 게 문 대표 설명. 대학생 이하은(21)씨는 "2개의 줄만으로 애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해금을 무릎에 올려놓고 활을 켤 때면 내가 특별해지는 느낌"이라며 "우리 국악기를 배운다는 뿌듯함도 크다"고 했다. 가야금을 배우는 직장인 한소라(23)씨는 "가야금 연주자들의 단아한 자태와 청아한 소리에 반해 도전하게 됐다"며 "줄을 퉁기다 보면 손가락에 물집도 잡히지만 제대로 소리가 났을 때의 행복감이 크다"며 웃었다
악기가 당신의 우울증을 치유한다
악기를 통해 새로운 삶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반려족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더 테이블' 설문조사에 따르면 '반려악기가 생긴다면 해보고 싶은 것?'이란 질문에 '봉사활동이나 재능기부 등의 활동을 하고 싶다'(55.4%), '아마추어 콘서트 무대에 오르고 싶다'(22.1%), '가족 모임에서 연주하고 싶다'(16.4%)는 답변이 나왔다.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에 근무하는 이우영(32)씨는 초등학교 밴드부에서 트럼펫 연주를 시작했다. 중·고등학교에서 밴드부를, 대학에선 오케스트라 동아리를 거쳐 입사 후엔 삼성필하모닉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며 매년 연주회 무대에 오른다.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특별한 무대를 경험하죠."
‘반려악기’ 이렇게 골라라!
-악기는 소리가 가장 중요하다. 직접 들어보고 자신의 귀에 아름답고 편안한 것으로 고른다.
-내 몸에 맞는 악기는 따로 있다. 들어보고 만져봐야 적정한 크기에 몸에 착 감기는 악기를 찾을 수 있다.
-너무 싼 악기는 금물. 품질을 장담할 수 없다. 마음대로 연주되지 않는 경우도 많아 쉽게 포기할 수 있다.
-초보 연주자가 너무 비싼 악기를 골라도 안 된다. 관리가 쉽지 않아 부담만 된다. 악기의 진가는 연주 실력과 비례한다.
-즐겨 듣는 음악, 좋아하는 연주자의 악기를 선택하면 더욱 오래 즐겁게 연습할 수 있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악기는 전문 매장에서 악기 전문가의 조언에 귀 기울일 것!
-악기를 익히려면 연습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연습 환경을 고려해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악기를 선택할 것.
[강정미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